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타타르의 멍에 (문단 편집) == 역사 == [[호라즘 제국]]을 초토화시킨 [[칭기즈 칸]]은 [[제베]]와 [[수부타이]]를 시켜서 호라즘 제국의 샤 [[알라 웃 딘 무함마드|무함마드 2세]]를 추격한 뒤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조지아 왕국]]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킵차크족을 격퇴시킨 후 1223년 5월, 루스 공국 연합군과 [[칼가강 전투|칼가강에서 싸워서]] 궤멸시킨다. 이후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한 뒤 [[오고타이 칸]]이 칸에 올랐고, 1236년 [[바투 칸|바투]], 수부타이를 필두로 본격적인 원정군이 파견된다. [[라쟌]] 공국의 수도를 5일 만에 함락시킨 후[* 라쟌 공국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조차 없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전한다.] 콜롬나, 모스크바, 블라디미르를 갈아버린 뒤 노브고르드 인근의 토르조크를 함락시켰다.[* 이때 총사령관인 바투가 무려 2주나 허비했고, 결국 노브고르드 공국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이후 1240년 다시 러시아로 가서 키예프 인근을 초토화시킨 후, 마침내 키예프마저 함락시킨다. 이후 서쪽으로 가서 나머지 공국들을 초토화시킨다. 오고타이 칸이 1243년 사망하자, 헝가리와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진하던 몽골군은 다시 회군했고, 이 지역이 독립 후 바투의 후손들이 러시아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킵차크 칸국의 대칸은 바스카크([[다루가치]])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하여 루스 대공을 감독하게 하였다. 바스카크가 감독한 것은 대공과 대공이 징수하는 공물 등이었다. 이 공물은 교회의 성직자들을 제외한 모든 루스인들에게 인두세 성격으로 부과되어 징수되었다. 또한 대칸이 요구할 경우 대공은 적정 규모의 장정을 파견하여 대칸을 도울 의무가 있었다. 몽골-타타르의 지배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루스의 대공들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 사라이를 의무적으로 왕래해야 했고, 자신의 대공직을 인정해주는 대칸의 야를릭(몽골어: ᠵᠠᠷᠯᠢᠭ / зарлиг, 러시아어: ярлык)이라는 윤허장을 얻어내야만 했다. 이 블라디미르 대공의 직위를 얻기 위해 모스크바 공과 [[트베리]] 공이 서로 치졸하게 경쟁하기도 하였다. 대공직을 얻기 위한 루스 공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은 대칸에 대한 종속을 더욱 강화시켜주었고, 루스의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권력투쟁에 불신과 환멸을 느끼면서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높여주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러한 치졸한 경쟁은 이반 1세 시기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대공직을 두고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은 모스크바 공국의 유리를 몰아내고 [[1304년]] 대칸으로부터 야를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313년]], 우즈베크 칸의 취임식 때 유리가 사라이에 가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새로운 대칸으로부터 새로운 야를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유리는 우즈베크 칸의 누이인 콘차카와 결혼했다. 이로써 동시대에 두 명의 대공이 존재하게 되었고, [[1317년]] 유리와 미하일은 이를 두고 전쟁을 벌였으나 모스크바 공국이 참패하게 되었다. 유리의 아내도 포로로 잡혀 트베리 공국에서 죽었다. 대칸은 두 대공을 사라이로 소환하였고, 미하일을 대칸에게 항거했다는 죄목으로 [[1319년]] 처형시켰다. 미하일의 처형으로 유리는 비로소 단독으로 대공 직위에 재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22년]], 미하일의 아들 디미트리가 대칸에게 바칠 공물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유리를 고발하였다. 이 죄목으로 유리는 더이상 대공직을 유지할 수 없었다. [[1326년]], 디미트리와 유리는 사라이에서 만났고, 디미트리는 아버지 미하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유리와 결투를 하여 유리를 죽였다. 대칸은 디미트리가 사사롭게 형벌을 내렸다며 그를 처형했다. [[1327년]]엔 트베리 공국에 몽골의 다루가치가 부하들과 내려와 도시들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여기에 몽골의 다루가치가 공작을 죽이고 자신이 공작이 되어 이슬람을 퍼트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트베리 공작 알렉산드르는 주민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주민들이 합세해 그들을 모두 죽였으나 오히려 몽골의 보복을 불러왔고 [[1328년]]에 대공직을 유리의 동생 이반에게 주었다. 그후 알렉산드르는 여러 국가들로 도망다니다 [[1335년]] 러시아로 돌아와야했으며, [[1339년]]에 자신의 아들과 함께 [[거열형]]으로 처형당한다. [[1368년]] 트베리 공국의 미하일 2세(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알기르다스[* [[요가일라]]의 부친]와 동맹을 체결하고 난 뒤 마마이[* 킵차크 칸국의 권신]로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직의 야르릭을 받아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그가 블라디미르에 입성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1375년]] 미하일은 대칸으로부터 다시 야르릭을 확인받았으나, 드미트리는 도리어 트베리 공국의 영토를 침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다수의 루스 공들은 드미트리에게 충성하였다. 결국 드미트리의 독단적인 행동을 보다 못한 킵차크 칸국 측이 [[1378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군대를 보내 그곳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어진 보즈하 강 전투에서는 칸국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마마이는 설욕을 갚고자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 랴잔 공 올레그와 동맹을 체결하고 2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 드미트리도 일부 제후들의 지원을 받아 15만 대군을 소집했다. [[1380년]] [[9월 18일]], 쿨리코프 언덕에서 마마이의 군대와 드미트리의 군대가 맞붙었다. 드미트리는 리투아니아군이 오기전에 결전을 서둘렀고, 결과는 드미트리 측의 승리였다. 쿨리코프 전투는 지금까지 무패신화를 자랑하던 몽골-타타르가 처음으로 패배한 역사적인 전투로써 루스가 몽골-타타르로부터 해방되는 첫걸음이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240년(혹은 1238년)부터 쿨리코프 전투(1380년) 때까지를 따로 타타르의 압제(насилие татарского)라고도 구별한다. - 오원교 (2011). 329p] 여담으로, 이때 마마이의 군대가 점거하고 있던 고지에 마마이 쿠르간, 즉 마마이 고지라는 이름이 붙는데, 훗날 이곳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더 큰 전투]]의 격전지가 된다. 패전 직후 마마이는 [[토크타미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곧 사망하며, 토크타미쉬는 사라이에서 새로운 대칸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토크타미쉬에게 값진 공물을 보낸 것 외에는 종속의 표시도, 알현하지도 않았다. 토크타미쉬는 이를 문제삼고 [[1382년]]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불태우고 루스 전 지역에서 잔인한 복수를 자행했다. 드미트리는 킵차크 칸국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칸에게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고 대칸으로부터 대공의 야르릭을 받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는 몽골-타타르가 루스 지역에 입힌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드미트리 다음 대공인 바실리 1세(Василий I Дмитриевич) 때에는 [[티무르 제국]]의 초대 군주 [[티무르]]의 침공을 받았다. 바실리 2세(Василий II Тёмный) 때인 [[1445년]]에는 킵차크 칸국이 분열하여 [[카잔 칸국]]이 출현하였다. 동년 7월 카잔 칸국의 군대에 의해 바실리 2세가 포로로 잡히고 10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바실리 2세 다음 대공인 [[이반 3세]]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루스 지역을 통합시키고 동시에 절대군주 체제를 확립한 군주였다. 이반 3세의 치세 때 모스크바 공국은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였고, 이는 러시아가 근대적인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반 3세 시기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궁중 문화와 예절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러시아는 전제군주국이 되었다. 이는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한편, 더이상 러시아가 킵차크 칸국의 종속국이 아니라는 제스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480년]] 이반 3세는 스스로를 정교회의 수호자라고 칭하였고, 자신을 [[차르]]라고 선언했다. 이미 티무르 제국과의 충돌과 분열로 쇠퇴한 [[킵차크 칸국]]은 이러한 이반 3세의 독단적인 행동에 별다른 제재를 할 수 없었다. 이로써 몽골-타타르의 오랜 지배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